밤과 노는 아이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이윤정 옮김
상권 452페이지, 하권 498페이지-각권 11,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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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내 '곧 나와요' 상태였던 밤과 노는 아이들이,
가을도 한참 깊어진 11월에야 겨우 나오게 되었습니다. ㅠ.ㅠ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광골과 비슷할 정도로 두껍습니다. (내용은 더 많습니다.)
평소의 편집으로는 너무 두꺼워질 것 같아서, 광골보다 서체를 작게 해서 줄수를 늘렸습니다.
너무 빽빽해 읽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비교적 가볍게 읽히는 책인 만큼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요. ^^
정식 발매일은 11월 5일 예정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아래 이어지는 내용은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1권의 앞부분입니다.
길지는 않지만 주요 인물이 대부분 등장합니다. (한둘은 빠져 있고,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름만 등장합니다만 ^^)
책이 나오기 전에 맛뵈기&예습하시라고 올립니다~
고즈카 고타와 헤어지게 될지 말지가, 오늘 결정된다.
츠키코는 잰걸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공학부동 건물은 츠키코가 평소에 생활하는 교육학부동에 비해 비교적 새 건물이라 깨끗하다. 교육학부동 벽은 누렇게 색이 바랜 콘크리트 위에 자잘한 금이 여럿 나 있는데다 역대 선배들의 품위 없는 낙서까지 잔뜩 남아 있는데, 이곳 벽에는 얼룩 한 점 없다. 낙서는 말할 것도 없다. 손을 대선 안 될 것 같은 하얀 벽 위의 고요함,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츠키코에게 병원을 연상시킨다.
계단을 오르다 아는 얼굴과 만났다.
“안녕, 교지.”
“츠키.”
고즈카와 같은 연구실에 소속되어 있는 그의 친구, 이시자와 교지다. 그는 츠키코를 보더니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짧은 갈색머리를 무스로 삐죽삐죽 세운 헤어스타일. 그 머리를 하려면 아침마다 제법 시간이 걸리진 않을까. 츠키코는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잡지에 나올 것 같은 탈색머리는 유행이라 정의된 난잡함을 갖추고 있다. 물 빠진 청바지를 입은 긴 다리와 소매 없는 러닝셔츠에서 뻗어나온 건강하게 그을린 팔. 그렇게 체격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자답고 탄탄한 팔로 보이는 건 뼈대가 굵어서일 것이다. 가느스름한 눈의 오른쪽 눈꺼풀 위. 한쪽 눈에만 금으로 된 링 피어스를 하고 있다. 그렇게 눈에 띄는 곳에 피어스를 하고 있는 주제에, 귀나 입술에는 없다. 오른쪽 눈꺼풀 외에는 한군데, 혀에 피어싱을 했다는 것을 츠키코는 알고 있다.
교지는 눈매가 상당히 날카롭다. 실제로 얘기해 보기 전에는 외모가 너무 무서워서 접근하기 어렵지만, 반면에 여자한테는 인기가 있었다. 츠키코가 여자와 함께 있는 교지를 볼 때마다 같이 있는 상대가 달랐고, 그것도 다들 엄청나게 예쁜 애들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딱딱한 분위기와 내면의 친근함을 잘 섞어 쓰면서 여자들의 마음속에 슬쩍 파고들어간다.
자기주장이 확실한 날라리는 좋겠다고 츠키코가 말하자, 고즈카는 어깨를 으쓱하며 걔 하고 다니는 거 공학부에선 튀어, 대단한 용기야, 라는 말로 교지를 평가했다.
교지가 묻는다.
“고즈카?”
“응.”
“연구실에 있어. 아마 오늘은 진정이 안 될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는 있지만, 안절부절못하는 건 분위기로 알 수 있는 법이지.”
“그렇지.”
“뭐, 그것도 츠키 네가 더 그렇겠지만.”
교지는 계단을 한 단, 천천히 내려갔다. 츠키코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놀리는 듯한 웃음을 짓는다. 정말로 재미있어 하는 건지도 모른다. 왠지 그런 태도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 마음에 안 든다.
츠키코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교지는 피식 웃고 나서 다시 물었다.
“혹시 집에 왔었어?”
“안 갔어. 십중팔구 연구실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오늘은 올 거야?”
고즈카와 교지는 대학 근처의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같이 자취하고 있다. 대학에 입학하고 바로 알게 되었고, 신기할 정도로 파장이 잘 맞아 사이가 좋아졌다는 둘. 처음에는 따로 자취하고 있었지만 각자의 임대계약이 끝날 즈음에 서로 상의해서 좀 널찍하고 좋은 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같이 산 지는 아마 올해로 이 년째일 것이다.
“결과에 따라서.”
츠키코는 교지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대답한다. 더 이상 교지와 얘기하고 있다간 말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말해버릴 것 같다. 고즈카가 이곳을 떠나버리는 것에 대한 허전함이라든가, 지금부터 나올 결과를 생각하면 치밀어오르는 불안정한 감정이라든가, 낙선에 대한 희미한 기대라든가. 그것은 너무나 제멋대로인, 착한 여자답지 않은 감정이다. 완전히 츠키코에게만 좋은 일이다.
교지는 머리는 나쁘지 않다. 학교 성적이 좋은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노는 일에는 츠키코 주변의 누구보다도 익숙한 교지는 남녀를 불문하고 친구가 많다. 이벤트를 기획하는 자리의 중심은 언제나 교지. 그리고 그는 그 때문인지 다른 사람의 미묘한 감정변화를 잘 읽어낸다.
눈을 피한 츠키코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교지는 다시 한 번 짓궂게 묻는다.
“그거, 어느 쪽이면 올 건데?”
교지는 즐기고 있었다.
“고즈카의 미국행이 결정되면? 아니면 그게 안 되면?”
“미국행이 확정된다면…….”
츠키코는 교지를 노려보았다. 숨을 들이쉬고 말을 잇는다.
“고타가 그걸 기뻐할지, 불안해할지. 낙선했다고 하면 그걸 엄청 아쉬워할지 아니면 어딘가 안도하며 받아들일지. 내가 신경 쓰는 건 고타의 반응이야. 결과가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있어.”
“츠키 너 귀엽다. 불안한 주제에 아닌 척 허세부리는 게.”
“그래?”
츠키코는 빨간색이 조금 섞인 갈색 앞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굵은 웨이브로 얼굴 주변을 감싼 곱슬머리는 친구들도 곧잘 칭찬해준다. 그들 왈, 고저스. 츠키한테 잘 어울려. 츠키코는 당연하지, 라고 받아치며 웃고, 고즈카는 안경 속의 눈동자에 과장된 쓴웃음을 지으며 그거 일라이저 머리? 츠키코 네 차림새도 공학부동에선 튀어, 라고 했다.
교지 앞에서 과장스럽게 눈을 내리깔고 깜박이니 마스카라를 무겁게 칠한 속눈썹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진짜 어쩔 건데? 교지가 묻는다. 츠키코는 얼굴을 들었다.
“고즈카가 없어지면 외로워서 어쩔 줄 모를 거면서. 우리 집, 고즈카가 나가면 방 하나 비는데, 뭣하면 이사 올래? 츠키 너 지금 컴퓨터 관련이랑 비디오 접속 같은 거 전부 고즈카한테만 맡기고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 한 번 자 주면 내가 대신 챙겨 줄 수도 있어.”
“농담 마. 나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나갈 생각은 전혀 없어. 컴퓨터도 대학 네트워크만 접속되면 만족이고.”
츠키코는 웃는 얼굴로 거절한다. 대리석 복도와 오토락 설비를 갖춘 신축 아파트는 츠키코가 우연히 싼값에 발견한 좋은 물건이다. 일부러 집 찾기에는 어중간한 여름을 골라 찾아낸 파격적으로 싼 물건. 싸다고는 해도 보통 학생들이 사는 싼 아파트와 비교하면 상당한 집세를 내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거다. 기왕이면 가능한 세련되고 깨끗한 데서 살고 싶다.
츠키코는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언젠가는 고타랑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교지 때문에 못 그랬잖아.”
고즈카와 교지는 츠키코보다 두 학년 위다. 2년 전, 츠키코가 고즈카와 같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을 당시에는 틀림없이 자신과 고즈카는 같이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즈카가 동거인이라며 자신에게 소개한 것이 이 이시자와 교지다.
“그건 내 탓이 아니야.”
교지는 일부러 과장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표정을 풀고 웃었다.
“츠키는 정말 고즈카를 좋아하는구나.”
“그래? 보통 아닌가?”
“고즈카는 고향에 두고 온 츠키가 설마 대학까지 따라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걸.”
“따라온 거 아닌데.”
츠키코는 가볍게 볼을 부풀렸다. 자신이 고즈카 고타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불쾌했다.
“D대학교에는 교육학부가 있었던 데다가, 내 성적으로 가기 딱 좋았다고. 비슷한 조건의 다른 대학에 갈 바에는 고타가 있는 학교가 좋을 거라고 생각한 것뿐이야.”
“허전해지겠구나.”
교지가 말했다. 진심 어린 목소리로 들렸다. 장난치는 것 같았던 교지의 목소리가 갑자기 나직해졌기 때문이다. 츠키코는 반쯤 벌어져 있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짙은 빨강색 립스틱이 이에 닿는다. 자신의 입술이 생각 외로 건조해서 놀랐다.
“응.”
고개를 끄덕이고 나니 정체모를 감정이 목 아래, 가슴 위의 뼈 근처를 흔든다. 교지를 쳐다보니 그는 따뜻한 눈으로 가만히 츠키코를 보고 있었다.
츠키코가 고개를 숙이자 뼈가 불거진 교지의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이 몹시 따뜻하게 느껴져서,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 괜찮겠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교지나 다른 친구들이 걱정하는 만큼 자신이 고즈카에게 의존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괜찮다. 나는 아마도 지극히 안정되어 있고,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왜 교지는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어하는 걸까.
“뭐, 결과는 아직 모르지만 고즈카가 가게 되면 기뻐해 줘. 지금 안 가더라도 그 녀석은 분명 얼마 안 있어 멀리 떠날 거야. 그건 벌써 알고 있지? 언젠가는 헤어질 거.”
“……아사기는?”
“방금 갔어. 결과엔 별로 관심이 없나 봐. 자식 진짜 멋지다니까.”
교지는 기쁜 듯이 말했다.
“승패는 진짜로 반반이라고 생각해. 사실상 고즈카 고타와 기무라 아사기 둘이서 싸우는 거야. 다른 녀석들하고는 전혀 승부가 안 된다는 얘기지.”
“교지는 거기 나갈 생각은 안 했어?”
“나? 농담 말아.”
교지는 진심으로 웃기다는 듯이, 흰 이를 드러내며 쾌활하게 웃었다.
“공부도 연구도 엄청 싫어하거든. 졸업논문이야 쓰겠지만 그 이상은 됐다. 흥미가 없어.”
“그렇구나.”
“남의 일이란 거, 너무 재밌지 않냐?”
교지가 츠키코의 머리에 얹었던 손을 떼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옆을 지나칠 때, 속삭였다.
“고즈카랑 아사기. 누가 이길지, 그걸 지금부터 보게 된다고 생각하면 흥분으로 몸이 떨려.”
연구실에 들어가니 고즈카 고타는 컴퓨터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작은 책상이 딱딱하게 놓여 있는 이 공간은 그다지 넓지 않은 탓에 방의 형태가 완전한 직사각형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책상마다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고, 츠키코가 여기에 올 때마다 그 중 몇 개인가는 꼭 켜져 있다. 전기가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용한 진동음을, 츠키코는 좋아했다. 이게 있기 때문에 이 방은 완전한 정적에 싸일 일이 없다.
방에 들어온 츠키코를 맨 처음 알아차린 것은 고즈카가 있는 연구실의 대학원생이었다.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하기노 씨. 지적인 미인. 외부인인 츠키코가 이곳을 찾아와도 싫은 얼굴 한 번 하지 않고 커피나 홍차를 끓여 주는 멋진 선배다.
“츠키.”
그녀의 목소리에 방 안쪽에 있던 고즈카가 고개를 든다. 그의 눈이 츠키코에게 초점을 맞추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피곤한지도 모른다. 움직임이 둔하다.
“안녕하세요.”
하기노에게 그렇게 대답하면서 고즈카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든다. 연구실 안에는 하기노와 고즈카 둘뿐이다. 하기노가 고즈카의 책상 쪽을 슬쩍 보고는 츠키코에게 말했다.
“결과가 나오는 건 십 분쯤 뒤일까. 세 시에 메일이 오게 되어 있거든. 진나이 선생님은 지금 심사회에 가셔서 안 계셔.”
진나이는 고즈카가 있는 연구실의 교수다. 하지만 거의 연구실 안쪽 교수실에 틀어박혀 있어서 츠키코와는 제대로 면식이 없다.
“방금 밖에서 교지를 만나서 들었는데요, 아사기는 집에 갔어요?”
“응. 결과엔 별 관심 없대. 얄미운 녀석이지. 그 왕자님같이 서늘한 표정 그대로, 잽싸게 사라졌어.”
교지랑 똑같은 말을 한다. 츠키코는 고즈카의 맞은편에 있는 기무라 아사기의 책상을 본다. 새까만 화면. 정전기가 끌어들인 미세한 먼지가 모니터 위를 엷게 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사기는 인간한테 필요한 정서의 나사가 두세 개 빠진 것 같아요.”
츠키코가 말했다.
고즈카의 책상 위에는 무슨 자료 같은 종이 다발과 포스트잇이 잔뜩 붙여진 두꺼운 책이 잡다하게 쌓여 있는 것에 비해, 아사기의 책상 위는 텅텅 비어 있었다.
‘서늘하다’. 방금 하기노가 한 말이 맞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땀을 흘리고 있을 때에도, 언제나 아사기에게서는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츠키코는 고즈카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며칠 만에 만나는 그는 무척 졸린 눈을 하고 있었다.
“왔어?”
“불안해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츠키코가 대답한다.
“공강시간이고 해서, 근처까지 온 김에 들러 봤어.”
“고마워, 생각해 줘서 고맙다.”
고즈카는 마시고 있던 커피 잔을 가볍게 들어 츠키코에게 내밀었다.
“츠키코도 마실래?”
“됐어. 괜찮아.”
“그래? 원두가 바뀌어서 좀 맛있어졌거든. 진나이 선생님 아는 사람이 해외여행에서 선물로 사왔다나 봐.”
“그럼, 나중에 마실래.”
“응.”
고즈카는 웃었다. 어딘가 피로가 배어나오는 표정이었지만, 안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것을 보고 츠키코는 안심한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가 한 일에는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할 만큼 하고 나면 후회하지 않는 고즈카를, 츠키코는 좋아했다.
츠키코와 고즈카가 재적하고 있는 D대 게시판에 ‘정보공학’에 관한 논문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은 것은 작년 가을의 일이다. 관동 지역의 몇몇 대학이 공동으로 주최한 콩쿠르 모집요강. D대를 비롯한 국립대학 3개교와 사립대학 5개교가 합동으로 움직이는, 상당히 이례적이고 대대적인 프로젝트인 것 같았다.
그냥 ‘정보공학’이라고 하면 공학부의 전문분야 논문을 연상하게 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학’은 협의(狹義)가 아니다, 라고 덧붙여져 있었다. 대상이 된 대학의 학부생 모두에게 응모자격이 있으며, 논문의 테마인 ‘정보공학’이라는 말의 해석에도 그다지 구애되지 않는다. 현재의 정보화 사회에 관해, 그 배경이나 경향을 통계적으로 크게 정리해도 좋고, 반대로 전산수식 프로그램을 짜는 등 내용을 좁게 잡아도 된다. 모집요강이 붙은 게시판 앞에서 학부생들은 흥분했다. 최우수상 표창은 심사위원장의 도장이 찍힌 얄팍한 상장 한 장이라 거기에 흥미가 있는 사람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학생들은 그 옆에 내걸린 부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4년간 미국 유학.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명문 세라 대학으로의 초대티켓. 학비와 교재비, 왕복 교통비는 물론, 현지에서의 주거가 보장되고 생활비로 충분한 액수의 용돈이 매월 지급된다. 꿈같은 조건이었다.
각 대학의 상층부에 세라 대학에서 교환학생 제안이 있었던 모양이다. 세라대학은 아직 일본에 자매학교가 없는 상태지만, 이번 콩쿠르 결과에 따라 그 상대가 결정될 것 같기도 했다.
현역 대학원생에게는 응모자격이 없는 것도 그쪽에서 정한 것으로, 자기 분야를 아직 완전히 정하지 않은 학생들을 교환하기로 한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부상인 유학에는 약간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었다. 금전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는 대신, 유학이 결정된 학생은 중도 귀국이 일체 금지된다. 친척의 결혼식이나 친구의 장례식, 남겨두고 온 애인이 죽어도. 예외로 인정되는 것은 3촌 이내의 가족이 죽었을 때 정도라고 한다.
츠키코는 당시, 그런 게 학내 게시판에 붙은 것도 몰랐다.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놀러 간 고즈카네 집에서 그가 응모서류 중 하나인 이력서를 쓰고 있는 걸 보았을 때다. 츠키코는 놀랐다. 당시 고즈카는 대학에 들어와 세 번째 가을을 맞이했을 때였지만 취업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졸업 후에도 D대학 연구실로 진학할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취직하려고? 츠키코는 처음에 그렇게 물었다. 넌 우수하잖아? 심사가 엄하기로 유명한 장학금도 받고 있잖아? D대학원 학비는 걱정 없지 않아?
그게 아냐. 고즈카는 웃으며 명랑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 얘기를 했다.
‘대학원생은 응모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나 같은 학부생이라도 가능성이 있거든. 논문 테마로 생각한 걸로 하면 연구실 공부랑도 병행할 수 있어. 지금 하는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삼아 내 볼까 해.’
“아사기는 집에서 결과를 보는 건가?”
“그렇겠지. 남 앞에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서툰 것 같으니까.”
고즈카가 온화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걸 보면 츠키코는 그가 정말로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츠키코와는 반대다. 츠키코는 사람을 부정적인 면부터 보고 행동 뒤에 감추어진 악의를 찾아내어 해석하지만, 그는 아니다. 언제나 사람을 선의로 받아들인다.
“그래? 얄미운 느낌이 드는데. 어차피 자기가 일등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그래.”
커피 컵을 책상 위에 놓고, 고즈카가 곤란한 듯 웃으며 츠키코를 보았다.
“벌써 자신이 뽑혔으리라는 걸 알 것 같으니까. 그래서 결과가 나오면 곤란해질 걸 아는 거지. 자기가 뽑힌 걸 축하받고, 평가받고. 그러면 감사인사를 하거나 적당히 부끄러운 척도 해야 되는데, 그게 서툴거든. 게다가 날 위로하는 것도 잘 못할 것 같으니까. 평가를 받든, 다른 사람이 분하게 생각하든, 걔한텐 그게 당연한 결과일 거야.”
“하지만 아사기는 고타가 쓴 논문을 본 건 아니잖아? 어째서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거야?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
“맞아. 그러니까 굉장한 거지.”
고즈카가 엷게 웃고는 아사기의 책상 위로 시선을 던진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어떻다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쓴 논문만으로 결과에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거야.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나도 그래 보고 싶다.”
기무라 아사기는 고즈카와 같은 연구실에 속해 있는 청년이다. 대학에 입학해서 첫 해 가을에, 츠키코는 그와 아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놀랐다. 아사기는 매우 수려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일순 여자가 아닌가 눈을 의심했다. 팔다리가 가늘었다. 몸 전체가 가늘고 피부가 희었다. 츠키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보다 속눈썹이 길고 눈이 커다란 남자를 보았다. 그의 또렷한 쌍꺼풀 아래에서 색이 옅은,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가 차분한 빛을 띠고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는 염색한 게 아닌 원래 머리색이라고 한다.
아사기에게는 ‘분위기’가 있다. 가령 다 같이 사진을 찍으면, 나온 사진 속에서는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마르고 연약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사진 속에서 아사기 혼자만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섞이지 못하고 붕 떠 있다.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존재 그 자체가 시선을 끈다.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같이 살아 있다는 체온을 느낄 수 없는 아사기였지만, 막상 친구가 되어 보니 무척 인간다웠다. 처음에 츠키코는 그 얼굴과 분위기에 압도당했지만, 평범하게 무언가를 먹고 츠키코나 고즈카에게 농담도 하는 그를 보고 안심했다. 뭐야, 친구가 될 수 있겠는걸,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사기는 자기가 미청년이라는 걸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공연히 겸손한 척하지도 않는다. 나는 예쁜 데다 멋져. 츠키코에게 ‘내가 너보다 용모가 단정하지’라고 실례되는 말도 한다. 츠키코는 그걸 분명 농담일 거라는 한계선에서 용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쳐도 그 말은 아사기가 하면 농담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그가 자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두뇌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사기는 머리가 좋다. 그건 고즈카도 마찬가지지만 그와 아사기는 종류가 완전히 다르다. 고즈카는 분명 우수하지만, 츠키코는 그가 엄청난 노력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목표를 위해서 신념을 가지고 임하는 자세가 멋있고, 츠키코는 그걸 좋아한다. 그러나 아사기에게는 그게 없다. 고즈카와 같은 조건의 장학금을 받고 있는 이유가 ‘그냥, 한 번 넣어 봤더니 통과돼서’라는 한 마디이다. 아사기는 타고난 천재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미국유학이 걸린 논문심사에 아사기도 응모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연구실도 츠키코의 주변도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연구실 전체의 반응을 보면 아까 교지가 말한 견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재미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즈카 고타와 기무라 아사기.
이번 심사는 그들이 속해 있는 이 진나이 연구실이 우위라는 소문이 있다. 우연히도 올해 봄에 같은 테마의 연구심사회가 전국 대학을 대상으로 열렸는데, 거기에서 진나이 연구실의 이 두 학생이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수상했다.
“기무라는 미국에 가면 정말 여러 가지를 배워서 돌아오겠지. 그가 뭘 전공으로 고를지가 기대돼.”
“완전히 남의 일 얘기하는 말툰데.”
츠키코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타는 자신을 너무 낮은 위치에 둔다니까. 정신 차려. 앞으로 미국에 가면 조금씩 고쳐야 돼. 옆에서 보고 있으면 그런 면이 답답할 때도 있으니까.”
“응.”
아사기의 책상에서 시선을 떼고, 고즈카는 다시 츠키코를 보더니 어딘지 기쁜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별말씀을.”
대답하고 나서, 츠키코와 고즈카는 동시에 다시 기무라 아사기의 책상을 보았다.
고즈카는 지금 그렇게 말했지만, 아사기도 결과가 두려운 건 아닐까. 자신(自信)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충격은 클 것이다.
“고즈카.”
하기노의 목소리에, 츠키코와 고즈카는 입구 근처에 있는 그녀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일어서서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가리켰다.
“시간 됐어. 메일 도착했을 거 같은데.”
입구 문 옆에 걸려 있는 벽시계는 3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아아, 네. 고맙습니다.”
어딘지 멍한 목소리로 고즈카가 하기노에게 대답한다. 츠키코의 얼굴을 힐긋 보고 나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츠키코에게는 무슨 신호처럼 보였다. 신호의 뜻은 지금 자신이 긴장하고 있는 것을 츠키코에게 보이고 만 것에 대한 사죄로도, 떨어지더라도 동정하지 말아 달라는 의사 표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화면에서는 여러 개의 선이 겹친 유선형 물체가 규칙적으로 매끄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고즈카가 키보드를 가볍게 두드리자 화면이 파랗게 변했다. 이 컴퓨터는 락이 걸려 있습니다. 해제는 지정관리자와 k-kozuka만이 가능합니다. 표시 아래에 나온 패스워드 입력창에 고즈카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숫자와 알파벳을 쳤다. 옆에서 보고 있던 츠키코도 내용을 알 수 없을 만큼 빠른 손가락의 움직임.
고즈카가 메일 프로그램을 열었다. 바로 굵은 글자 표시가 화면 중앙에 나타났다. ‘한 통의 읽지 않은 메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츠키코는 너무 티 나지 않게 신경 쓰면서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었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고즈카 혼자여야만 한다. 츠키코가 봐도 되는 것이 아니다.
고즈카가 마우스를 움직여 클릭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츠키코 옆에서,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가 조용히 눈을 깜박이는 것이 전해져 온다. 숨을 삼키는 것 같은 소리도 없었고 눈을 부릅뜨는 것 같은 기척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그가 말했다.
“놀랐다.”
“왜 그러는데?”
그를 향해 얼굴을 들자 그때까지 자기 자리에 앉아 있던 하기노가 일어나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츠키코 옆에 서서, 츠키코처럼 고즈카를 바라본다. 그녀도 물었다.
“누구야? 너? 아니면 기무라?”
“한 방 먹었어.”
“응?”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즈카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숨을 들이쉬고, 츠키코와 하기노에게 자신의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그의 얼굴에는 어색한 쓴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당했습니다, 하기노 씨. 예상도 못했어요.”
화면에는 결과를 알리는 메일 내용이 표시되어 있었다.